지루한 영화가 명작이 될 수 있을까요?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중반부쯤에서 리모컨에 손이 갔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꽤 오래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코믹하면서 짠하고, 느슨한 것 같으면서 후반에 제대로 치고 들어오는 영화. 처음 느낌과 끝 느낌이 이렇게 다른 영화도 드뭅니다.
쓸모없음 — 서서히 밀려나는 사람의 얼굴
일반적으로 '한물간 배우' 이야기라고 하면 단순한 몰락 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공식을 비틀어 냅니다.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너질까봐 안간힘을 씁니다. 그게 더 보기 힘듭니다.
릭 달튼은 술에 절어 있고 욕이 입에 달려 있지만, 대사 한 줄을 틀릴 때마다 촬영 트레일러 안에서 혼자 자신을 갈아붙입니다. 이 장면이 저한테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였습니다.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완결된 감정적 흐름을 가진 연속 장면들의 묶음을 뜻합니다. 대단한 액션도, 반전도 없는데 그 짧은 독백 장면이 릭 달튼이라는 인물 전체를 설명해 버립니다.
이런 인물 묘사가 가능한 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란티노의 캐릭터 빌드업(character build-up) 방식 덕분이기도 합니다. 캐릭터 빌드업이란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누적으로 쌓아 올리는 서술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극적인 사건보다 릭 달튼이 하루를 어떻게 버티는지를 보여주는 데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씁니다. 덕분에 관객은 그가 왜 저렇게 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데, 그 침묵 자체가 무겁게 쌓입니다. 특히 히피 공동체를 방문하는 장면은 별일이 없는 것 같은데 묘하게 긴장이 흐릅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우정인지 의존인지 경계가 흐릿한데, 그 애매함이 오히려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비슷한 관계가 현실에 있다보니 더 공감이 갔습니다.
카타르시스 — 느리게 달려서 세게 치는 법
타란티노 영화라고 하면 과격한 폭력 묘사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봤는데, 이 영화는 전반부와 중반부 내내 그 기대를 철저하게 유보시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단 한 번, 짧고 강하게 터뜨립니다.
이 구조를 영화 용어로 내러티브 텐션(narrative tension)이라고 합니다. 내러티브 텐션이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감정적 긴장을 의도적으로 축적시키는 서사 기법입니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서 폭력을 최대한 아껴두다가, 관객이 이미 인물들에 충분히 감정이입 된 시점에 터뜨립니다. 그래서 그 짧은 폭력 장면이 유독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실제 역사적 사건을 미리 알고 가는 게 좋습니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찰스 맨슨(Charles Manson) 추종자들의 연쇄 살인 사건, 그리고 그 피해자 중 한 명이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였다는 사실. 이 배경을 알면 영화 후반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해당 사건에 대한 자세한 역사 기록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Tate murder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가 극 중에서 주된 서사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두고 '분량 낭비'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건을 알고 나면 그녀가 그냥 웃고, 자기 영화를 극장에서 혼자 관람하고, 낯선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친절한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타란티노는 그녀에게 대사 대신 '삶'을 주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실제 역사 사건을 아는 관객과 모르는 관객 사이에 생기는 감정의 낙차 — 알고 보면 그 낙차가 카타르시스를 몇 배로 키웁니다.
- 전반부 내내 쌓인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에 대한 감정이입 — 이것이 없으면 후반부 폭력 장면은 그냥 폭력입니다.
- 타란티노 특유의 대안 역사(alternative history) 서술 방식 —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일종의 안도감과 통쾌함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미장센 — 1969년 할리우드가 화면에 살아 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랑스어에서 온 영화 용어로,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세트, 의상, 배우의 위치와 움직임 등을 총괄하는 개념입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단순한 시대 재현을 넘어섭니다.
196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거리, 간판, 자동차, 극장 간판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이것이 배경 장식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공간 자체가 릭 달튼이라는 인물의 심리를 반영합니다. 한때 저 간판 위에 자기 이름이 있었을 사람이 지금은 그 거리를 그냥 차로 지나가는 장면. 대사 없이 그 감각이 전달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봤을 때, 이 장면들에서 대사보다 화면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영화 전문 매체도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로저 이버트 공식 사이트 리뷰에서도 이 작품의 시대 재현과 분위기 구성에 대해 호평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시각적 밀도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와 차원이 다릅니다.
한편, 이 영화가 1960~70년대 미국 사회와 할리우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상당 부분이 평평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타란티노가 지향한 '서부극의 종언'이라는 주제처럼, 이 영화는 스스로 그 시대의 끝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시대를 모르는 관객에게는 그 애도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편인 저도 결국 끝까지 붙잡혀 있었으니까요. 러닝타임이 길고 전개가 느리다는 점은 분명한 단점이지만, 그 느린 호흡이 후반부의 한 방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의도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긴 영화는 지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지루함과 몰입 사이 어딘가를 계속 오가면서 결국 관객을 붙들어 둡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찰스 맨슨 사건과 샤론 테이트에 대해 간단히 검색해 두는 것을 권합니다. 그 10분이 이 영화를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줍니다. 저는 사전 지식 없이 먼저 봤다가 나중에 다시 봤는데, 두 번째가 압도적으로 더 좋았습니다. 타란티노가 긴 러닝타임을 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후반의 단 몇 분에 어떻게 수렴하는지를 알고 나면, 이 영화가 그냥 '지루한 명작'이 아니라 굉장히 정밀하게 계산된 영화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느리고 나른했지만, 끝나고 나서 가장 오래 생각난 영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당황했다. 타란티노 영화니까 당연히 폭발적인 장면들이 이어질 거라 기대했는데, 영화는 그냥 두 남자가 LA를 돌아다니고,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수다를 떠는 장면들로 가득했다. 중반부쯤엔 이게 맞나? 싶어서 러닝타임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루하지가 않았다. 릭 달튼이 촬영장에서 대사를 까먹고 혼자 차 안에서 자책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쓰렸다. 전성기를 지나 서서히 잊혀가는 사람의 불안함이, 화려한 할리우드 배경과 묘하게 대비되면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나도 언젠가 저런 기분을 느끼게 되겠구나.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영화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타란티노는 1969년 LA의 햇살과 냄새와 공기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화려한 사건 없이도 시대 하나를 통째로 붙잡아두는 영화가 있다는 걸 이 작품으로 처음 실감했다.
빠른 전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다 보고 나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작품을 고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