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맨 1 504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DC 슈퍼히어로 영화 아쿠아맨은 평점 8.77을 기록하며 당시 DC 확장 유니버스(DCEU) 흥행 부진의 늪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입니다. 저도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솔직히 기대보다 의심이 앞섰습니다. DC가 과연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DC 확장 유니버스의 위기 속에서 탄생한 배경
2018년은 DC 확장 유니버스(DCEU)가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 있던 시기였습니다. DCEU란 DC 코믹스 원작 캐릭터들이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연결되는 마블의 MCU에 대항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말합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가 연달아 혹평을 받으며 시리즈 전체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던 상황이었지요.
이 상황에서 아쿠아맨의 연출을 맡은 인물이 제임스 완이라는 점은 당시로서 꽤 파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제임스 완은 컨저링 시리즈와 인시디어스로 공포 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선택이 정답이었습니다. 제임스 완의 호러적 감수성은 수중 세계를 묘사하는 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녹아들었고, 그게 이 영화를 단순한 슈퍼히어로 오락 영화 이상으로 끌어올린 동력이 됐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틀란티스 신화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서 커리가 왕위를 되찾는 이야기 구조는 사실 아서 왕 전설(Arthurian Legend)을 현대 슈퍼히어로 장르에 이식한 것입니다. 아서 왕 전설이란 중세 영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왕의 탄생과 성장 신화로, '왕의 자격을 증명해야 왕이 된다'는 핵심 구조가 이 영화와 거의 동일합니다. 저는 이 구조 자체가 진부하다고 느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열광한 이유는 결국 시각적 완성도에 있었다고 봅니다.
압도적인 미장센과 편의주의적 서사 사이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장면은 아틀란티스에 처음 입성하는 시퀀스였습니다. 네온빛 발광 생물체와 고대 건축 양식이 뒤섞인 미장센(mise-en-scène)은 관객의 시각 피질을 완전히 압도합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로 '무대 위에 놓는다'는 뜻이며, 영화에서는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채, 구도, 세트 디자인 등을 총괄하는 개념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아쿠아맨의 수중 세계는 동시대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입니다.
특히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펼쳐지는 루프탑 추격전은 카메라 워킹(Camera Movement)의 교과서 같은 장면입니다. 카메라 워킹이란 촬영 카메라의 이동 방식과 속도를 통해 긴장감과 리듬감을 조절하는 기술입니다. 이 장면에서 제임스 완은 카메라를 인물의 움직임에 착 달라붙듯 운용하면서 액션의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트렌치 심해 구간에서는 감독 특유의 호러적 감수성이 폭발합니다. 수백 마리의 기괴한 해양 괴수가 배를 덮치는 장면은 공포 영화의 문법을 블록버스터에 이식한 사례로, 저는 이 부분이 솔직히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서사(Narrative)는 얘기가 다릅니다. 서사란 이야기의 흐름과 구조, 인물 간의 인과 관계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아쿠아맨의 서사는 시각 효과의 화려함에 비해 지극히 평면적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이 시련을 거쳐 진정한 왕으로 거듭난다는 구조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완성된 영웅 서사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제가 아쿠아맨을 보며 가장 답답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빌런 구성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사실 블랙 만타였습니다. 부친의 복수를 위해 아쿠아맨을 쫓는 그의 동기는 메인 빌런인 옴보다 오히려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정작 블랙 만타는 영화 내내 서브플롯(Subplot)에 머물다 소멸합니다. 서브플롯이란 메인 이야기 라인과 병행해 전개되는 부차적 이야기 줄기를 말합니다. 이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서브플롯에서 소모시킨 것은 분명한 기회 손실이었다고 봅니다.
아쿠아맨이 아서 왕 전설의 현대적 변주임을 감안할 때, 평론적 관점에서 이 영화의 서사 완성도를 평가한 해외 연구 자료들도 참고할 만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 - Aquaman 2018). 비평가 점수와 관객 점수 사이의 격차가 이 영화의 이중성, 즉 대중적 흡인력과 비평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틀란티스 입성 시퀀스: 네온 발광 생물과 고대 건축이 결합된 미장센의 정점으로, 시각적 몰입도가 가장 높은 구간입니다.
- 시칠리아 루프탑 추격전: 리드미컬한 카메라 워킹으로 액션 쾌감을 극대화한 장면으로, 단일 액션 시퀀스 완성도 면에서 이 영화 최고의 장면입니다.
- 트렌치 심해 구간: 호러 감독 제임스 완의 본령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으로, 블록버스터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기괴하고 숭고한 미학을 완성했습니다.
- 삼지창 획득과 카라덴 대결: 영웅 서사의 클라이맥스를 구성하는 장면으로, 스케일 면에서 압도적이지만 서사적 필연성은 다소 부족합니다.
- 옴과의 최후 결투: 형제 갈등을 해소하는 결말이지만, 감정적 전개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집니다.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전환점으로서의 전망
아쿠아맨이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은 단순한 흥행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DC 확장 유니버스 역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한 작품이라는 기록은, 이 영화가 시리즈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분기점이 됐음을 수치로 증명합니다(출처: Box Office Mojo - Aquaman).
이 성공의 배경을 분석하면, 결국 '접근성'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릅니다. 저스티스 리그처럼 전작 지식이 없으면 즐기기 어려운 구조가 아니라, 아쿠아맨은 오리진 스토리(Origin Story)로 설계됐습니다. 오리진 스토리란 한 캐릭터가 어떻게 영웅이 되는지를 처음부터 보여주는 이야기 방식으로, 사전 지식 없이도 극장에 들어올 수 있다는 진입 장벽 측면에서 큰 장점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라이트한 관객층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아쿠아맨 2가 이미 개봉한 지금, 이 1편을 다시 돌아보면 그 의의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DC가 '보여주는 영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증명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합니다. 서사의 진부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시각적 체험을 원하는 분이라면 쿠팡 플레이에서 다시 볼 만한 작품입니다.
아쿠아맨 1은 분명히 좋은 영화이지만, 위대한 영화라고 부르기엔 서사의 밀도가 한 꺼풀 얇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세계관에 이 감독의 시각적 재능을 담을 그릇이 더 단단했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중 세계를 이 수준으로 구현한 영화는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찾기 어렵습니다. DC 슈퍼히어로 영화에 아직 발을 들이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 작품을 첫 번째 선택지로 권하겠습니다.
바다는 기다리지 않는다, 왕이 준비될 때까지
물속과 물 위, 두 세계 사이에서 태어난 남자가 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인 줄 알았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엔 그것이 가장 강력한 자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쿠아맨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제임스 완 특유의 감각으로 바닷속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각적 언어로 구현해냈다.
아틀란티스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형광빛 해양 생물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거대한 해룡이 전쟁터를 누비는 장면은 어떤 판타지 영화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스케일이었다. CG의 향연이 자칫 공허해질 수 있었지만, 색채와 구도에 대한 집착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제이슨 모모아는 거칠고 유쾌하며 진심이 넘쳤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영웅이 아니라, 실수하고 농담하고 당황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오히려 캐릭터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앰버 허드와의 케미도 자연스럽게 흘렀고, 악당 오션 마스터의 분노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어 일방적인 구도를 피했다.
다소 과한 전개와 촘촘하지 못한 서사가 아쉽긴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바다가 이토록 화려하고 뜨거울 수 있다는 것, 아쿠아맨이 처음으로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