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가 전 세계 62명의 비평가를 대상으로 선정한 '최고의 미국 영화 100편' 1위가 1941년작 시민 케인입니다. 이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저도 약간 의아했습니다. 히치콕도, 스필버그도 아닌, 25세 청년 오손 웰즈의 데뷔작이 1위라니요.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그 이유를 납득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로즈버드, 그 한마디가 뭔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이 거대한 저택 제나두에서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 "로즈버드(Rosebud)". 기자 톰슨이 그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이 영화 전체를 이끄는 축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미스터리 구조처럼 보여서 가볍게 앉아 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저는 잠깐 멍해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손에 쥔 남자가 끝내 놓지 못했던 것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툭 걸렸습니다.
로즈버드는 단순한 소품이 아닙니다. 영화 비평에서 흔히 맥거핀(MacGuffi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맥거핀이란 서사를 이끌어가는 장치지만 그 자체가 핵심 의미는 아닌 요소를 뜻합니다. 그런데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는 맥거핀을 넘어서, 자본주의가 결코 되살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메타포(Metaphor), 즉 상징이 됩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던 기억 같은 것들이요. 저도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그 소박하고 아무 욕심 없던 시간이, 지금 제가 치열하게 쫓는 무언가보다 더 값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케인이 살았던 제나두 성은 외형적으로는 권력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카메라는 그 공간을 철저히 공허하게 담아냅니다. 넓고 호화롭지만 따뜻하지 않은 방들. 그 미장센(Mise-en-scène)이 인상적이었는데, 미장센이란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 즉 배경, 조명, 배우의 위치 등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영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웰즈는 이 공간 자체로 케인의 내면을 설명합니다. 대사 없이도요.
딥 포커스, 한 화면에 모든 것을 담은 기술의 혁명
혹시 영화를 보다가 화면 앞쪽과 뒤쪽이 동시에 선명하게 잡힌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요즘은 흔하지만, 1940년대에는 거의 불가능한 기술이었습니다. 오손 웰즈는 촬영감독 그레그 톨랜드와 함께 딥 포커스(Deep Focus) 기법을 완성했습니다. 딥 포커스란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모두 선명하게 잡아내는 촬영 기법으로,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이나 권력 관계를 편집 없이 한 화면 안에서 표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여기에 더해 로우 앵글(Low-angle) 촬영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로우 앵글이란 카메라를 낮은 위치에서 위를 향해 찍는 방식으로, 피사체를 더 크고 압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케인이 연설하는 장면에서 이 앵글이 활용될 때, 그의 거대한 야망이 시각적으로 그대로 전달됩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40년대 영화에서 이 정도의 계산된 화면 구성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오손 웰즈가 이 작품의 연출, 주연, 각본을 모두 25세에 해냈다는 사실은 지금도 놀랍습니다. 그가 촬영 전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9)를 한 달 내내 반복해서 봤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웰즈는 "매일 저녁을 먹고 나서 어떻게, 왜 이런 장면이 됐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봤다"고 했습니다. 결국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만든 영화가 수십 년 뒤 세계 비평가 62명에게 1위를 받은 셈입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민 케인을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시민 케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적 성취를 이뤄냈는지, 영화학 교육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는 영국 영화연구소(BFI)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왔는지 흐름이 한눈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비선형 서사, 퍼즐처럼 맞춰지는 한 인간의 초상
시민 케인의 서사 구조는 지금 봐도 현대적입니다. 주인공의 죽음에서 시작해, 여러 인물의 회상이 겹쳐지면서 케인이라는 사람이 조금씩 입체적으로 조각납니다. 이것이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입니다. 비선형 서사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거나, 여러 시점을 중첩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사 방식입니다.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영향을 준 구조이지만, 1941년에 이미 이 방식을 이렇게 세련되게 구현했다는 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레벨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케인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주의자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독재자였습니다. 이 구조 자체가 "한 인간을 단 하나의 시선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케인은 결국 어떤 사람이었나"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민 케인이 기술적·서사적으로 이룩한 혁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딥 포커스(Deep Focus) 기법으로 한 화면 안에서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적 거리를 동시에 표현한 것
- 로우 앵글(Low-angle) 촬영을 통해 천장이 보이는 과감한 프레임으로 캐릭터의 야망과 고립을 시각화한 것
-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와 복수 시점 회상 구조로 인간의 복잡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준 것
- 로즈버드라는 단일 메타포(Metaphor)로 자본주의적 성공의 공허함을 영화 전체에 관통시킨 것
이 네 가지 요소는 개별적으로도 혁신이지만, 하나의 작품 안에서 모두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이 시민 케인을 여전히 '영화 교과서의 첫 페이지'로 부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BBC가 선정한 100대 미국 영화 목록 전체도 궁금하시다면 BBC Culture 원문 기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조용한 밤에 거실 조명을 낮추고 혼자 앉아 이 영화를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처음에는 흑백 화면과 느린 호흡이 낯설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로즈버드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자리를 뜨기 어렵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한번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거울 앞에 선 케인의 모습이 무한히 겹쳐 보이는 장면처럼, 이 영화는 한 번 보고 끝나는 작품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