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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수 (수중액션, 시대극, 여성서사)


류승완 감독 영화라면 땅 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몸싸움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7월 개봉한 영화 <밀수>를 보고 나서 그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바닷속을 무대로 펼쳐지는 범죄극이라니, 예상 밖이었고 그래서 더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수중 액션, 생각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짝패>, <베테랑>, <모가디슈>, <베를린>까지 모두 지상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밀수>에서 감독은 미장센(mise-en-scène)의 무대를 아예 바닷속으로 옮겼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공간·조명·인물 동선을 통틀어 이르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수중이라는 공간은 중력과 빛, 시야가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연출자 입장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문법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처음 봤을 때, "이게 정말 한국 영화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푸른 물속에서 해녀들이 자신들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은, 말 그대로 숨이 막혔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격투가 아니라 부력(浮力)과 수압을 이용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부력이란 물속에서 물체가 위로 밀려 올라가려는 힘을 뜻하는데, 이 물리적 변수가 액션의 속도와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지상의 추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촬영 현장이 어떠했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주요 수중 촬영지 중 하나인 전라남도 여수 거문도의 백도는 작은 바위섬들이 마치 병풍처럼 늘어선 한국의 10대 비경 중 하나입니다. 화면에서 보이는 그 신비로운 바닷속 풍경이 세트가 아니라 실제 자연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로케이션(location) 선택, 즉 실제 촬영 장소를 정하는 결정이 영화의 분위기를 절반 이상 좌우합니다.

<밀수>의 수중 액션 시퀀스가 특별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해녀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지형 우위가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2. 수중 촬영 특유의 느린 듯한 움직임이 오히려 공포감과 서스펜스를 극대화합니다.
  3. 전라남도 여수 백도의 실제 바닷속을 배경으로 써 세트 티가 나지 않는 압도적인 현실감을 확보했습니다.
  4. 지상 장면과 수중 장면 사이의 편집 리듬이 관객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조율합니다.

70년대 시대극, 이 디테일이 진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시대극을 볼 때 세트장 티가 나면 몰입이 확 깨지는 편입니다. 그런데 <밀수>의 주요 배경인 어촌 마을 '군천'은 강원도 삼척 근덕면 덕산항 일대에 실제로 지어진 세트장을 기반으로 했고, 1970년대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질 만큼 정교했습니다. 2021년에 제작된 이 세트장은 촬영이 끝난 뒤 철거되었다고 하니, 영화 속에서만 남게 된 공간이 된 셈입니다.

여기에 음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음악감독이 선곡한 1970년대 대중가요들, 김추자와 산울림의 곡들이 장면 곳곳에 배치되었는데 이것이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닙니다. 다이에제틱 사운드(diegetic sound)와 논다이에제틱 사운드(non-diegetic sound)를 교차 활용하는 방식이 돋보였습니다. 다이에제틱 사운드란 화면 속 인물들도 들을 수 있는 소리(라디오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등)를 말하고, 논다이에제틱 사운드는 관객에게만 들리는 배경 음악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를 영리하게 섞어 쓰면 시대감이 자연스럽게 쌓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유독 OST에 자꾸 귀가 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의 해안 지방에서는 산업화의 파고 속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생계를 잃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역사적 맥락이 영화의 서사적 토대가 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범죄 영화의 흥행 공식 중 하나가 '시대적 배경과 개인의 생존 욕구가 맞물릴 때'라는 점인데, <밀수>는 그 공식을 해양이라는 특수한 공간으로 확장한 사례입니다. 1970년대 해안 지방의 밀수 범죄가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무게감을 한 층 더 올려줍니다.

여성 서사, 단순한 '걸크러시'가 아닙니다

혹시 이 영화를 "김혜수와 염정아가 나오는 시원한 액션물"로만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 제가 처음엔 그랬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조춘자(김혜수 분)와 엄진숙(염정아 분)의 관계는 단순한 의리나 우정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두 인물은 서사의 중심축이자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대표하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를 그립니다. 캐릭터 아크란 영화가 진행되면서 인물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뜻합니다.

춘자는 성공과 돈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인물이고, 진숙은 어촌계 해녀들의 맏언니로서 공동체적 책임감을 짊어진 인물입니다. 이 둘이 오해와 배신을 거쳐 다시 손을 잡는 과정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저는 중반부에 두 사람이 다시 신뢰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 눈빛과 행동 하나로 모든 걸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권필삼(조인성 분)과 장만석(박정민 분)의 서사가 교차합니다. 권필삼은 베트남 참전 경험을 발판으로 부산 밀수판을 장악한 인물로, 사업가적 냉정함과 야수적 본능이 공존합니다. 박정민이 연기한 장만석은 처음에는 순박해 보이지만 자신의 욕망을 서서히 드러내는 인물인데, 제 경험상 이런 '점진적 악의 발현' 연기가 훨씬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영화의 총관객 수가 약 280만 명(2023년 8월 4일 기준)에 그쳐 손익분기점 400만 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작품성과 화제성 면에서는 그 해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 회자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에서도 2023년 여름 시즌 주요 화제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 <밀수>는 관람 후에도 오래 머릿속에 남는 장면들이 있는 작품입니다. 수중 액션의 물리적 쾌감, 70년대 감성의 OST, 두 여성 캐릭터의 뭉클한 연대감이 서로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정서로 묶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가능하면 사운드가 좋은 환경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바닷속 장면에서 소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직접 느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아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