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강해야 주인공도 빛난다는 말, 다들 동의하시나요? 저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4편까지 전부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흥행 성적과 캐릭터 완성도가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1편의 장첸이 그 증거입니다. 박스오피스 기록은 속편들에 밀리지만, 장첸이라는 빌런은 이후 시리즈 전체의 기준점이 되었고 지금도 회자됩니다.
장첸 캐릭터
장첸(윤계상 분)을 단순히 "무서운 악당"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설명이 절반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장첸이 가진 진짜 힘은 충동성(衝動性)에 있습니다. 충동성이란 상황을 먼저 계산하지 않고 감정과 본능이 앞서 행동하는 성향을 뜻합니다. 독사파 두목 안성태를 처리하고 곧바로 채무자 길수까지 죽여버리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후폭풍을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타입이죠.
그런데 이 충동성이 오히려 그를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만듭니다. 안성태가 "내 누군지 아니?"라고 물었을 때 장첸의 대답은 "돈 받으러 왔는데 뭐 그것까지 알아야 되니?"였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상대의 위계(位階), 즉 조직 내 서열이나 사회적 위치를 철저히 무시하는 그 태도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장첸이 매력적인 빌런인 이유를 좀 더 구조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목표가 단순하다: 오직 돈이라는 명확한 동기가 행동 하나하나를 일관되게 만든다.
- 두려움이 없다: 중국 공안에도, 한국 경찰에도 밀려본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다.
- 경력이 있다: 하얼빈에서 300여 명의 조직원을 이끈 행동대장 출신으로, 즉흥적인 것 같아도 조직 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다.
- 생존 본능이 날카롭다: 식당에서 마석도와 형사들을 먼저 알아채고 선제적으로 도망치는 장면에서 동물적 직관이 드러난다.
이 네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빌런이 국내 상업 영화에서 흔치 않았기 때문에, 장첸은 이후 범죄도시 시리즈 빌런들의 기준이 되었다고 봅니다.
빌런 분석
장첸 혼자였다면 1편의 긴장감이 지금만큼 쌓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른팔인 위성락(진선규 분)이라는 캐릭터가 장첸의 무서움을 증폭시키는 앙상블(ensemble) 구조, 즉 두 캐릭터가 서로를 보완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위성락은 공격성을 여과 없이 몸으로 표출하는 인물입니다. 경찰에 붙잡혀 그 공격성을 표출할 출구를 잃자 스스로 혀를 깨물려 시도할 만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저 사람은 무기 그 자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첸이 그 무기를 쥐고 있는 사람이고요.
흥미로운 건 위성락의 한계도 명확하게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마석도가 설치한 함정에 쉽게 걸려들고, 장첸이 자신을 의심하자 대놓고 담배를 물며 반감을 드러냅니다. 감정 조절 능력의 부재가 왜 그가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이처럼 위성락을 단순한 보조 악당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한계를 가진 입체적 인물로 그린 것이 1편 각본의 힘이라고 봅니다.
빌런의 대척점에 있는 조연들도 주목할 만합니다. 곽 사장과 원 사장은 살인 청부를 의뢰하는 자들인데, 장첸에게 비용 인상을 요구받고 뒤집어지는 곽 사장 옆에서 원 사장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식사를 이어가는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범죄도시 시리즈가 보여주는 다층적인 악(惡)의 구조가 사실 1편에 이미 다 담겨 있었던 셈입니다.
참고로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KMDb)에 따르면 범죄도시 1편은 2017년 개봉 당시 68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크게 웃돌았고, 이후 시리즈 제작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카타르시스
범죄도시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가 마동석이 시원하게 때려잡는 장면 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공적 제재(公的制裁), 즉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국가 권력이 범죄자를 응징하는 행위에 대한 집단적 갈망이 이 영화에 담겨 있기 때문에 관객이 열광한다고 봅니다.
마석도와 장첸의 1대1 대결은 그 카타르시스의 정점입니다. 장첸은 마석도를 회유하거나 협상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시리즈의 빌런들이 종종 경찰을 포섭하거나 약점을 이용하려는 것과 달리, 장첸은 그냥 달려듭니다. 이 단순함이 오히려 두 인물의 대립을 순수하게 만들고, 마지막 공항 화장실 장면의 폭발력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솔직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범죄도시 시리즈 전편에 걸쳐 빌런들의 동기가 결국 '돈'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현실 범죄의 대다수가 경제적 동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 설정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 아닌 것'을 목적으로 삼는 빌런의 공포가 얼마나 다른 층위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처럼 논리 자체를 무너뜨리는 캐릭터, 세븐의 존 도우처럼 신념을 무기로 삼는 캐릭터가 범죄도시 세계관에 언제쯤 등장할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향후 시리즈에서 원 사장 스타일의 빌런, 즉 신체적 위협 대신 자기 확신과 고도의 사기적 지능으로 무장한 캐릭터가 등장하면 장르 자체가 한 단계 더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진흥위원회(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의 역대 흥행 데이터를 보면 범죄 액션 장르는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관객의 기대치도 함께 높아지고 있습니다. 더 입체적인 악인에 대한 수요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범죄도시 1편이 지금도 회자되는 건 장첸이라는 빌런이 단순히 무서운 것을 넘어 일관된 논리와 본능을 가진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흥행 2, 3, 4편 속에서도 "첫 빌런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시리즈를 아직 처음부터 보지 않으셨다면, 1편부터 순서대로 보시길 권합니다. 빌런의 결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감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