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영화를 틀었다가 중간에 꺼버린 적 있으십니까? 요즘 극장가에서 쏟아지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들을 보다가 정작 가슴이 안 뛰어서, 오히려 30년도 넘은 영화를 다시 꺼내 든 경험이 저도 있습니다. 1988년작 <다이 하드>는 그 허전함을 단번에 채워주는 영화입니다. 피 흘리고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존 맥클레인이라는 인물이,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출연진: 브루스 윌리스와 앨런 릭먼이 만든 화학반응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저는 브루스 윌리스보다 앨런 릭먼에게 먼저 눈이 갔습니다. 당시 브루스 윌리스는 단역을 전전하던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고, 이 영화가 그를 최고의 액션 배우로 끌어올린 발판이 되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화면을 압도하는 건 악당 역의 앨런 릭먼이었습니다.
앨런 릭먼이 연기한 한스 그루버는 카리스마 빌런(charismatic villain), 즉 관객이 증오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매력적인 악당의 전형으로 자리 잡은 캐릭터입니다. 카리스마 빌런이란 서사 내에서 주인공에 버금가는 존재감과 논리를 갖춘 반동 인물을 뜻합니다. 맞춤 수트에 침착한 말투로 건물 전체를 지배하는 그루버를 보면, 연극 무대에서 경력을 쌓은 앨런 릭먼이 왜 이 역할에 최적이었는지 바로 납득이 됩니다. 나중에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스네이프 교수로 또 한 번 시대를 대표하는 악역을 완성했으니, 그의 연기 이력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은 별거 중인 아내 홀리 제네로(보니 베델리아)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온 뉴욕 경찰입니다. 홀리가 근무하는 나카토미 플라자 빌딩이 한스 그루버 일당에게 점거당하면서 그는 혼자 건물 안에 고립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상태였다는 설정이 영화 내내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을 더해주는데, 이 부분이 단순한 총격 액션 이상의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홀리가 자신의 성(姓)을 숨기며 강단 있게 버텨내는 장면은 지금 봐도 꽤 인상적입니다.
조연 중에서는 LAPD 경사 알 포웰(레지날드 벨존슨)이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직접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무전으로만 맥클레인을 돕는 인물인데, 이 무전 씬들이 영화의 감정적 완충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과거의 실수로 총을 손에 잡지 못하던 그가 마지막 순간 존을 구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액션미학: 왜 이 영화는 아직도 교과서인가
요즘 액션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하게 피로감이 쌓일 때가 있습니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되고 폭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정작 심장이 안 뛰는 거죠. 제 경험상 그 이유는 주인공이 너무 안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이 하드>는 그 반대입니다.
존 맥티어난 감독이 이 작품에서 구현한 핵심 미학은 베리시밀리튜드(verisimilitude)입니다. 베리시밀리튜드란 관객이 극 중 상황을 실제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실감의 미학을 뜻합니다. 맥클레인은 유리 파편 위를 맨발로 달리다 발을 다치고, 싸울수록 온몸이 망가져 갑니다. 슈퍼히어로처럼 무한 체력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저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의 소진을 보여줍니다. 그 결핍이 오히려 극적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공간 활용 방식도 탁월합니다. 나카토미 플라자라는 폐쇄된 고층 빌딩은 하나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으로 기능합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 동선, 세트 디자인 등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치하는 연출 방법론을 뜻합니다. 환기구, 지하 주차장, 옥상 헬기 착륙장까지, 층마다 다른 물리적 특성이 각각의 액션 시퀀스를 다르게 만들어줍니다. 같은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도 단조롭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미국 영화 연구소(AFI)의 스릴러 100선에 이 영화가 이름을 올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현란한 CG가 아니라 공간의 물리적 제약과 인물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내는 아날로그 서스펜스야말로 이 영화가 수십 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이유라고 봅니다.
<다이 하드>가 이후 액션 장르에 끼친 영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고립된 단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액션 서사 구조를 대중화했습니다. 이후 "다이 하드 온 어(Die Hard on a ___)" 공식이 수많은 아류작의 기획 언어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 무적의 근육 영웅 대신, 상처 입고 지쳐가는 일반인 영웅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 빌런에게도 납득 가능한 목표와 지성을 부여하는 서사 방식을 액션 장르에 정착시켰습니다.
- 유머와 위기를 교차시키는 완급 조절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관객 경험 설계의 기준점을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를 지배하던 아놀드 슈왈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식의 슈퍼맨형 히어로 공식이 이 영화 한 편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이 하드>는 장르사적으로도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존 맥티어난 감독은 이 영화 직전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프레데터>를 연출했던 인물인데, 그가 왜 이 작품에서 방향을 완전히 틀었는지 그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읽힙니다.
결말: 나카토미 빌딩의 마지막 밤
엔딩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이미 본 분들이라면 이 장면이 왜 명장면인지 다시 한번 곱씹어볼 만합니다.
한스 그루버의 부하들을 하나씩 처리하던 맥클레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막다른 길에 몰립니다. 한스가 홀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녀를 직접 인질로 잡으면서입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맥클레인은 최후의 수를 씁니다. 등 뒤에 테이프로 붙여두었던 권총으로 한스를 쏘고, 한스는 건물 꼭대기에서 추락하며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장면에서 적용된 연출 기법이 체호프의 총(Chekhov's Gun)입니다. 체호프의 총이란 앞서 등장한 소품이나 설정이 후반부 결정적 순간에 반드시 사용되도록 구성하는 서사 원칙으로,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등 뒤의 권총이 복선으로 깔리고 정확히 그 순간에 폭발하는 이 구성은 각본 완성도 면에서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이 영화의 현재 평점은 9점대 초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이 하드 시리즈 전체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입니다. IMDb 공식 페이지에서도 액션 장르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나왔음에도 1편의 아성이 무너지지 않는 건, 결국 이 영화가 액션의 쾌감 외에도 부부 관계의 균열과 회복이라는 감정선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화가 끝날 때 홀리와 존이 함께 걸어 나가는 장면은 화려하지 않지만 묘하게 따뜻합니다. 빌딩 하나를 맨몸으로 버텨낸 사람이 결국 원했던 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아내와의 시간이었다는 사실, 그게 이 영화의 결말이 오래 남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지쳐서 뭘 봐야 할지 모르는 밤에 <다이 하드>를 권해드립니다. 거실 불을 끄고 시원한 음료 하나 옆에 두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그렇게 다시 봤고,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습니다. 시리즈 2편도 충분히 볼 만하지만, 1편이 주는 밀도와 긴장감은 솔직히 이후 편들이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 당장 스트리밍 플랫폼을 여세요. 이미 보셨다면, 다시 보셔도 분명 새로운 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