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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멀티버스, 마일스 모랄레스, 애니메이션)


주말 오후, 아이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냥 무난한 히어로 영화 한 편 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쏟아지는 영상과 음악에 오히려 제가 먼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편도 좋았지만, 이번 작품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멀티버스,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였습니다

전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멀티버스(Multiverse)는 여러 평행세계가 공존한다는 개념으로, 스파이더맨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멀티버스는 일종의 무대 배경에 가까웠죠. 그런데 이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는 달랐습니다. 멀티버스가 이야기 전체의 핵심 축이 되어, 그 안에서 갈등이 생기고 캐릭터들이 충돌합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이 영화가 단순히 "여러 세계가 있어요"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는 캐논 이벤트(Canon Event)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이는 각 스파이더맨의 삶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비극적인 사건, 즉 정해진 운명을 뜻합니다. 이 캐논 이벤트를 어기면 우주 전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설정인데, 이걸 받아들이고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거부하고 새 길을 개척할 것이냐가 영화의 핵심 질문이 됩니다.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는 스파이더맨들 사이에서 어딘가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가 거대한 운명의 벽 앞에서 낙담하지 않고 "내 운명은 내가 정해!"라며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아이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 장면이 단순한 히어로 액션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청춘들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무려 240명의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 규모 자체도 압도적이지만 각 캐릭터가 저마다의 개성과 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스파이더맨 vs 스파이더맨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이렇게까지 논리적이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질 줄은 몰랐습니다.

  1. 캐논 이벤트(Canon Event): 각 스파이더맨의 정해진 운명적 비극. 이를 어기면 해당 우주의 질서가 붕괴된다는 설정으로, 영화 전체 갈등의 출발점입니다.
  2. 멀티버스(Multiverse):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가 공존한다는 세계관 개념. 전편에서는 수단이었지만, 이번 편에서는 서사의 본체가 됩니다.
  3. 스파이더 소사이어티(Spider-Society): 멀티버스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결성된 스파이더맨들의 연합 조직. 쉽게 말해 스파이더맨들의 거대한 연합 조직입니다.

마일스 모랄레스와 그웬, 두 사람의 서사가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 보기 전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멀티버스 스케일이 워낙 커지다 보니, 개별 캐릭터의 감정선이 그 화려함 속에 묻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요. 제 경험상 이런 대형 세계관 영화들은 스케일을 키우는 대신 인물의 감정을 희생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스파이더 그웬(Spider-Gwen)이 드럼을 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단편 영화였습니다. 스파이더 그웬이란 피터 파커가 아닌 그웬 스테이시가 스파이더맨이 된 평행세계의 캐릭터를 뜻하는데, 이 장면에서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그녀가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는지를 단 몇 분 만에 보여줍니다. 분명 슬픈 장면인데 음악이 너무 잘 어울려서, 울어야 할지 전율해야 할지 모를 묘한 감정에 빠졌습니다.

마일스와 그웬의 관계도 그냥 히어로들 간의 우정이나 로맨스로 소비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차원이 달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시간, 그럼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던 감정, 그리고 재회했을 때의 반가움과 동시에 밀려오는 어색함까지. 이 감정의 결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서 제가 직접 그 장면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 서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일스가 경찰관인 아버지와 나누는 관계, 어머니와의 교감이 멀티버스 액션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어서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라는 걸 계속 상기시켜 줍니다. 극장 문을 나서는 길에 아이가 "엄마(아빠), 나도 마일즈처럼 멋지게 내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라고 수줍게 물었을 때, 제가 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아이도 똑같이 받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순간이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이 영화의 비주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말을 잃었습니다. 만화책에서 방금 찢어낸 페이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인물마다, 세계마다 작화 스타일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하는데, 한 화면 안에서 인물, 배경, 색감, 선의 굵기까지 모든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감정과 주제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기법을 뜻합니다. 이 영화는 그 미장센을 세계관별로 완전히 다르게 구사합니다.

스파이더 그웬의 세계는 감정에 따라 번지고 흐르는 수채화 톤으로 구현되어 있고, 인도 뭄바이를 배경으로 하는 뭄바튼(Mumbattan) 세계는 라인아트 스타일로 역동적인 속도감을 냅니다. 스파이더 펑크의 세계는 콜라주(Collage) 기법, 즉 신문지나 포스터 조각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붙여놓은 듯한 반체제적 스타일로 표현됩니다. 세계가 바뀔 때마다 화면 전체가 달라지는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각 세계의 개성을 그대로 체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OST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힙합 프로듀서 메트로 부민(Metro Boomin)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힙합, EDM, 시티팝 등 다양한 장르를 씬의 감정에 맞게 배치했는데, 음악이 단순히 배경으로 깔리는 게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직접 대신해서 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이 영화의 신선도 지수가 95%를 넘긴 것도, 이런 시청각적 완성도가 평단에서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후반부가 다음 편을 위한 거대한 예고편처럼 열린 채로 끝나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 구조, 즉 결말을 해결하지 않고 긴장 상태로 이야기를 중단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저도 극장을 나오면서 "이게 끝이야?"라는 감정이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오히려 다음 편에 대한 강렬한 기대감으로 바뀌더라고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우주를 조금 더 떠돌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서도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극장을 나서면서 아이가 온 동네 거리에 거미줄을 쏘는 시늉을 하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이렇게까지 오래 마음속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한 번도 챙겨보지 않은 분이라도, 이 영화만큼은 꼭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특히 아이와 함께 보신다면, 영화가 끝나고 나누는 대화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깊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