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영화는 결말을 알기 때문에 재미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마지막 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노량해전의 결말을 이미 아는 상태로 들어갔는데도, 상영 내내 양손을 꼭 쥐고 숨을 참아야 했습니다. 결말을 아는 것과 그 과정을 체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김윤석과 백윤식, 두 장수의 무게감
일반적으로 역사 영화에서 주인공 배우 한 명의 연기가 작품을 이끌어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김윤석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과 백윤식 배우가 연기한 시마즈 요시히로, 이 두 사람의 장력(張力)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면서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장력이란 두 힘이 서로 당기며 팽팽하게 맞서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 쪽만 강해서는 그 긴장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김윤석의 이순신은 앞선 시리즈의 장군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아들 면을 잃은 이후의 이순신은 군사들 앞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지휘관으로 서지만, 혼자 있을 때는 죽은 장수들의 환영을 보며 무너지는 인간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철저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자식을 잃은 아비였던 그 이중성을 김윤석 배우는 대사 한 마디 없이 눈빛 하나로 표현해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명량이나 한산의 이순신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백윤식 배우의 시마즈는 등장 순간부터 달랐습니다. 일본 사극 특유의 발성 톤과 억양을 구사하는데, 일본어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게와 속도감이 진짜 일본 사극 배우의 더빙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규형 배우 말로는 일본어 선생님 세 명이 붙어 공부했다고 하는데, 백윤식 배우의 경우는 그런 언어적 노력 위에 배우 본인의 포스가 더해진 결과로 보였습니다. 적장이 이 정도 무게감을 갖춰줘야 이순신과의 대결 구도가 살아납니다.
100분 야간 해전, 스펙터클의 실체
해전 스펙터클이라는 말을 들으면 막연히 배 몇 척이 포를 쏘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보고 나서 그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그리고 명나라 수군까지 뒤엉킨 3국 동시 교전이었습니다. 노량해전이란 1598년 11월 19일 경상남도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으로, 이 전투를 끝으로 7년간의 전쟁이 마무리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출처: 두산백과 노량해전)
영화가 이 전투를 다루는 방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의 활용이었습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오랜 시간 끊김 없이 돌리는 촬영 기법으로, 관객이 그 공간 안에 직접 서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만들어냅니다. 카메라가 불화살을 따라가고, 포탄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갑판 위 백병전(白兵戰)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동합니다. 백병전이란 칼이나 창 같은 근접 무기를 들고 적군과 직접 몸을 맞대며 싸우는 전투 방식을 뜻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렸습니다.
특히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싸우는 백병전 장면에서 카메라 시점이 조선군에서 왜군으로, 다시 그 옆 병사로 옮겨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는지에 따라 카메라의 관점이 바뀌는 구조였는데, 그 덕분에 전쟁의 참혹함이 한쪽의 승리 서사로만 소비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봄이 9시간의 반란을 밀도 있게 압축했다면, 이 영화는 하룻밤 사이의 노량 전투를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펼쳐놓았습니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야간 씬에서 대포가 연속으로 터지다 보니 눈이 상당히 피로했고, 일반 관에서 북소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돌비(Dolby) 관람을 권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저는 일반 관에서 보고 나서 그 점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역사 고증과 스토리의 균형, 실제로는?
역사 영화는 고증이 엄격할수록 스토리가 약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3부작에 꾸준히 따라붙었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평가도 그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점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미 스포일러인 소재에서 서사를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조금만 비틀면 역사왜곡 논란이 터지고, 압축하면 고증 부실 지적이 나옵니다. 그 좁은 틈에서 김한민 감독이 선택한 것은 시간의 밀도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짚으면,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되어 1598년 노량해전으로 마무리된 7년간의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조선 선조 25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가 전쟁의 흐름을 바꾼 핵심 변수였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 맥락을 알고 영화를 보면 이순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 마무리를 고집했는지가 더 선명하게 읽힙니다.
영화 안에서 이순신과 시마즈의 병사 독려 방식 차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돌아가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시마즈는 이기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독려합니다. 얼핏 시마즈의 말이 더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군인의 비장함이 살기를 바라는 군인의 의지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오른다는 것을 이 장면 대비가 잘 보여줬습니다.
명나라 장수 진린 역의 정재영 배우와 등자룡 역의 허준호 배우에 대해 중국어 성조가 어색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중국어 성조를 제대로 구사하는 것이 외국인에게 쉬운 일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두 배우의 연기는 언어적 완성도 이전에 감정의 전달이 먼저였고, 그 부분에서는 충분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외국어 연기에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싶은 분들께는 그냥 중국 드라마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더 잘 즐기는 법, 제가 아쉬웠던 것들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직접 느낀 관람 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능하면 돌비(Dolby Atmos) 관을 선택하십시오. 이순신이 갑판 위에서 직접 북을 치는 장면의 울림이 일반 관과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일반 관에서 봤는데 그 부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 명량, 한산을 먼저 보고 가는 것을 권합니다. 죽은 장수들의 환영 장면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할 때 감정의 밀도가 훨씬 달라집니다.
- 쿠키 영상이 있으므로 자막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십시오. 극장 전체가 나갈 준비를 하다가 다시 앉는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 준사 역 김성규 배우의 서사에 주목하십시오. 왜군 출신으로 조선군이 되어 싸운 인물로, "의를 위해 싸운 7년이었다"는 마지막 대사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동이 트면서 전장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밤새 치열하게 싸운 양쪽 병사들의 시신이 낮의 빛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 장면에서 감독은 조용히 묻습니다. 이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는가. 그 질문이 극장을 나서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3부작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작품이었습니다. 명량이 용기의 영화였고 한산이 전략의 영화였다면, 노량은 비장함의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승리보다 올바른 마무리에 집중한 선택이 결국 이 3부작의 완성도를 높여줬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