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OST만 수백 번 들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2007년 픽사(Pixar)의 걸작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입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주말 저녁에 이 영화를 처음으로 제대로 봤고, 밥을 먹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쥐 한 마리가 이렇게 많은 감정을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쥐가 이렇게 귀여우면 곤란한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쥐를 정말 싫어합니다. 예전에 아이 학교에서 쥐 한 마리를 목격한 뒤로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크기로 따지면 쥐가 사람을 무서워해야 맞는데, 저는 반대로 소름이 돋아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라따뚜이는 내용은 커녕 제목도 외면한 채 OST만 틀어두는 이상한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쥐에 대한 거부감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레미가 주방을 가로질러 호다닥 달릴 때 나는 발소리, 앞발을 모으고 냄새를 맡는 그 작은 몸짓이 영화 내내 너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저게 귀엽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귀가하는 길에 실제 쥐가 달리는 걸 봤는데, "쟤도 레미처럼 발소리가 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변해버린 겁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진짜 힘입니다. 픽사의 의인화(anthropomorphism) 기법, 즉 동물이나 사물에 인간적인 감정과 행동을 부여하는 서사 기법은 단순히 귀엽게 보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가장 혐오받는 존재를 공감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관객이 가진 편견 자체를 흔드는 장치입니다. 브래드 버드 감독이 선택한 이 설정은 지금 봐도 굉장히 과감하고 영리합니다.
참고로 픽사는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실제 쥐의 움직임과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했고, 파리의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요리학교에서 현장 취재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Pixar Animation Studios). 그 공들인 준비가 스크린 위에서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걸음걸이, 그 연출의 디테일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레미는 평소에 두 발로 걷습니다. 앞발로 요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네 발로 기어다닐 수 없다는 게 레미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그런데 링귀니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직후, 레미는 네 발로 땅을 기어 달아납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밥숟가락을 내려놨습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 레미에게 단순한 이동 방식이 아니라, 요리사로서의 꿈과 자존감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감정 상태를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신체 언어(body language)로 표현했습니다. 신체 언어란 말이나 글이 아닌 몸의 움직임, 자세, 표정 등으로 감정과 의사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뜻합니다. 이 방법이 어떤 독백보다 훨씬 강렬하게 전달되었습니다.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시각적 스토리텔링(visual storytelling), 즉 대사 없이 이미지와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법은 오래된 전통입니다. 월-E의 침묵 서사, 업(Up)의 도입부 4분이 대표적입니다. 라따뚜이에서 레미의 걸음걸이 변화는 그 전통의 가장 섬세한 예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도 그 장면에서 "레미 왜 저렇게 걸어?"라고 물었고, 저는 설명하다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어른에게 더 깊이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연출 때문입니다. 아이는 귀여운 쥐 이야기를 보고, 어른은 체념과 좌절의 무게를 봅니다. 같은 화면을 보면서 전혀 다른 감동을 받는 구조, 이것이 픽사가 30년 넘게 사랑받는 이유라고 봅니다.
경청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어려운 것
영화가 끝난 뒤 아이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서더니 채소를 썰겠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말리려 했습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어수선해질 것도 뻔했습니다. 그런데 레미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쥐답게 살라"며 아들의 꿈을 핀잔했던 그 아버지가, 링귀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 나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뭔지 말해달라"고 했던 그 장면이요.
저는 아이 옆에 서서 같이 칼을 잡았습니다. 그게 경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청(active listening)이란 단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와 감정까지 파악하며 온전히 집중하는 적극적 듣기 행위를 말합니다. 레미의 아버지는 말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편견을 스스로 돌아봤고, 그 변화가 레미에게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힘을 줬습니다.
냉혹한 비평가 안톤 이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레미와 링귀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가 쓴 리뷰는 음식에 대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날선 비판만 해왔던 삶을 되돌아보는 반성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시퀀스입니다.
영화 속에서 경청이 관계를 바꾼 순간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레미의 아버지가 링귀니의 말을 듣고 아들의 꿈을 처음으로 인정하며 협력을 결심한 장면
- 안톤 이고가 레미와 링귀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자신의 비평 철학 전체를 재검토한 장면
- 링귀니가 레미에게 솔직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신뢰를 쌓아가는 장면
세 장면 모두 극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경청이 관계를 살리고 이야기를 전진시킵니다. <라따뚜이>가 요리 영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의 시각화, 픽사가 보여준 감각의 영역
영화의 기술적인 성취 중 저를 가장 놀라게 한 부분은 맛을 눈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레미가 치즈와 딸기를 동시에 먹을 때, 화면이 갑자기 추상적인 색채와 파동으로 가득 찹니다. 공감각적 표현(synesthetic expression), 즉 한 가지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치환하여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맛을 색깔과 형태로 번역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OST만 듣던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소리, 색채, 움직임이 하나로 연결된 총체적 감각 경험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음악만 들어도 파리의 주방과 레미의 열정이 느껴졌던 건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도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등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파리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반짝이는 레스토랑 조명, 어두운 하수구와 화려한 주방의 대비,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레미의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말해줍니다.
픽사가 이 영화를 통해 받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은 단순한 흥행 성공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온전한 예술 언어로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것도 정확히 그것입니다. 이건 어린이용 만화가 아니라, 어른이 봐야 더 많은 걸 가져가는 작품입니다.
영화 <라따뚜이>는 쥐가 귀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편견을 넘어 꿈을 향해 걷는 이야기이고, 경청 하나로 관계가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와 함께 본 그 주말 저녁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영화가 끝난 뒤 우리 둘이 주방에 나란히 서서 서툰 요리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오늘 저녁 밥 먹으면서 한번 틀어보시겠습니까? 분명 밥상보다 영화가 더 맛있게 느껴지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