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노래 한 곡이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발걸음이 멈춰진 경험 다들 있으실 겁니다. 영화 <친구>를 처음 봤을 때가 딱 그랬습니다. 2001년 개봉 당시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핸디캡을 뚫고 8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은, 단순한 조폭 영화가 아니라 청춘과 우정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였습니다.
소년들이 달리던 그 골목, 청춘의 기억
영화는 부산을 배경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세 개의 시간대를 가로지릅니다. 준석, 동수, 상택, 중호. 이 넷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넓은 도로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장면이 나올 때, 저도 모르게 가슴 어딘가가 먹먹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장면이 유독 오래 머릿속에 남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절을 다시 꺼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곽경택 감독은 이 영화를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연출했습니다. 자전적(autobiographical)이란 감독 본인의 실제 삶을 소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장면 하나하나에 작위적인 느낌이 없습니다. 소독차를 따라 뛰어다니는 아이들, 골목에서 벌어지는 패싸움, 어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어색하게 마주치는 순간들이 모두 지나치게 극적이지 않고 그냥 그 시절처럼 투박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감각입니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이 많지만, 이 영화만큼 학창 시절 친구 얼굴이 실제로 떠오른 작품은 없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을 때 연락이 끊긴 옛 친구 이름을 한참 폰 화면에서 만지작거렸습니다. 전화를 걸지는 못했지만요.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영화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우의 위치, 세트, 의상 등을 종합적으로 설계하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친구>의 미장센은 어둡고 축축합니다. 로우키(low-key) 조명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데, 로우키 조명이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를 강하게 주어 인물의 그늘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조명 기법입니다. 이 선택이 인물들의 파멸적인 운명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느와르가 살아있는 방식, 그리고 명대사의 무게
느와르(noir)는 원래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영화에서는 범죄, 운명적 파국, 도덕적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를 가리킵니다. <친구>는 이 느와르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거기에 한국 특유의 집단적 의리 정서를 얹었습니다. 그 조합이 당시 관객들의 가슴을 정확히 겨냥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남자들이 싸우는 영화겠거니 했는데, 보고 나니 준석과 동수 사이의 감정선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유오성이 연기한 준석은 과묵한 카리스마 그 자체인데, 그 과묵함이 단순한 포스가 아닙니다. 그는 말을 아끼는 대신 행동으로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반면 장동건이 연기한 동수는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내면 어딘가에서 계속 준석의 그늘을 의식합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부분입니다. 준석은 한 번도 동수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동수는 스스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게 라이벌 의식(rivalry)입니다. 라이벌 의식이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며 발생하는 경쟁 심리를 뜻합니다. 영화는 이 감정을 대사 한 줄 없이 눈빛과 행동만으로 설명해냅니다.
명대사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독보적입니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다"는 대사는 지금 들어도 울컥합니다. 조폭들의 의리를 미화하는 대사가 아니라, 진짜 친구 사이에서만 가능한 감정을 담은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를 두고 모든 대사가 명대사인 영화라고 하는데, 그 계보의 출발점이 바로 이 영화입니다.
<친구>가 한국 영화에 남긴 흔적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한국영상자료원 통계에 따르면 2001년 당시 <친구>는 서울 관객만으로도 296만 명을 동원했으며, 전국 기준 800만을 넘어선 것은 멀티플렉스가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실로 전례 없는 기록이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조폭 미화 논란,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이 영화를 두고 조폭 미화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조폭 미화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암흑 세계의 결말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꽤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인물이 막내 조직원에게 "준석이 형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이게 운명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인생 한 번 제대로 살아보는 거랑 혈기에 막 사는 거랑 다른 거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막내는 칼에 찔려 죽습니다. 이게 감독의 메시지입니다. 낭만처럼 보이는 조폭의 삶은 현실에서 그냥 시궁창이라는 것입니다.
준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던 두목이었지만, 말년에는 배신당하고 초라한 집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동수는 거리에서 살해당하고, 준석은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감독은 그들에게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 이후 비슷한 소재의 조폭 코미디 영화들이 쏟아졌지만, 그 중 800만 근처에 가기라도 한 작품은 없었습니다. 흥행이 모든 것을 증명하진 않지만, 적어도 대중이 이 영화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봤다는 증거는 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각종 예능에서 반복 재생된 명대사들의 원본 장면을 확인하는 재미
- 유오성의 과묵한 카리스마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는 것
- 어른이 된 후 흑화된 동수가 준석에게 맞서는 의상실 장면의 긴장감
- 마약에 중독되어 무너지는 준석의 모습이 주는 씁쓸함
- "나는 너를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다"는 대사가 나오는 맥락 전후를 집중해서 보기
또한 이 영화가 배우 김광규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기준으로 김광규가 압도적인 연기파 배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예능과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그 감각은 분명 이 영화에서 시작됐습니다. 원석을 발굴한다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항구도시, 제2의 수도라는 이미지에서 거칠고 강한 남자들의 도시라는 새로운 인상이 덧씌워졌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부산 관광객이 늘었다는 보도가 실제로 있었는데(참고: 부산관광공사), 같은 작품이 누군가에겐 일탈의 자극이 되고, 누군가에겐 여행의 동기가 된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자리를 못 뜨는 작품이 있습니다. <친구>가 그랬습니다. 느와르의 문법을 빌렸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우정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무거운지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에서 모두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오래된 친구에게 연락하고 싶어지는 영화를 찾으신다면, 이 작품을 권해드립니다.
--- 참고: 부산관광공사), 같은 작품이 누군가에겐 일탈의 자극이 되고, 누군가에겐 여행의 동기가 된다는 게 흥미롭습니다.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자리를 못 뜨는 작품이 있습니다. <친구>가 그랬습니다. 느와르의 문법을 빌렸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우정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무거운지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에서 모두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오래된 친구에게 연락하고 싶어지는 영화를 찾으신다면, 이 작품을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