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채널을 돌리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풍문으로 들었소'가 흘러나오는 순간 손이 멈췄습니다. 2012년 극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봤던 그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였습니다. 조폭 영화라서 가볍게 볼 줄 알았는데, 다시 봐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 드는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줄거리부터 명장면, 그리고 결말이 왜 불편하게 찜찜한지까지 직접 본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줄거리: 비리 세관원이 조폭 보스를 만났을 때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조폭 액션 영화'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부터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총 한 방 제대로 안 나오는데도 내내 긴장감이 유지되는 영화가 흔하지 않으니까요.
시대적 배경은 1982년 부산입니다. 주인공 최익현(최민식)은 비리로 먹고사는 세관 공무원인데, 엄밀히 말하면 조폭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쩡한 공무원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입니다. 영화에서는 이런 캐릭터를 반달(半達)이라고 부릅니다. 반달이란 깡패의 세계에 발을 걸쳤지만 완전히 건달이 되지는 못한 존재, 쉽게 말해 반쪽짜리 건달을 뜻합니다. 이 설정 하나가 영화 전체의 핵심입니다.
익현은 해고 위기를 모면하려다 우연히 히로뽕을 손에 쥐게 되고, 이를 처리하러 부산 최대 조직의 보스 최형배(하정우)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이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혈연으로 묶이면서 동맹이 시작됩니다. 익현의 로비력(인맥과 뇌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형배의 주먹이 결합한 이 파트너십은, 한국 사회 특유의 학연·혈연 카르텔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중반부에 익현이 조직 내부에 너무 깊이 개입하면서 형배와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90년, 노태우 정부가 실제 역사 속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당시 범죄와의 전쟁은 정부가 조직폭력배를 대대적으로 소탕하겠다고 선언한 실제 사건으로, 영화는 이 역사적 사실을 서사의 전환점으로 정확히 활용합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범죄 드라마가 아니라 사회 고발형 느와르(noir)로 본격적으로 변모합니다. 느와르란 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들이 등장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다루는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명장면: 웃기면서 섬뜩한 장면들의 연속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이렇게 많이 웃을 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웃고 나서 잠깐 멈칫하게 되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윤종빈 감독이 노린 게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겁니다.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적 연출인데, 블랙 코미디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그 안에 씁쓸하거나 불편한 사회 비판을 담는 기법을 말합니다.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익현이 경찰서에서 큰소리를 치는 장면입니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인마, 어저께도! 느그 서장이랑 밥 묵고! 사우나 가고! 다 했어!" 극장에서 이 대사가 나오는 순간 객석 전체가 폭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는데, 웃고 나서 '저런 사람이 실제로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였습니다. 인맥을 과시하며 법과 상식을 비틀어버리는 인물이 허구가 아니라는 게 더 무서웠던 겁니다.
"살아있네!"라는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배가 익현의 배짱을 인정하며 던지는 이 한 마디는 당시 유행어가 됐는데, 제 기억에는 그해 술자리마다 이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술잔을 부딪치며 "살아있네!"를 외치던 그 분위기가 영화의 명장면들과 겹쳐 지금도 떠오릅니다.
연출 면에서도 이 영화는 꽤 독특한 선택을 합니다. 슬로우 모션과 강렬한 음악을 동원한 화려한 장면을 보여주다가, 바로 다음 컷에서 그 인물들의 찌질하고 비굴한 면을 드러냅니다. '폼 나는 장면' 뒤에 숨겨진 허접함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이 미장센(mise-en-scène) 기법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 등을 설계하는 연출 방식입니다.
아래는 개인적으로 꼽는 이 영화의 핵심 명장면 세 가지입니다.
- "살아있네!" — 익현의 배짱에 형배가 인정을 던지는 순간. 두 캐릭터의 관계가 한 문장으로 규정되는 장면입니다.
- 서장 인맥 과시 장면 — "느그 서장이랑 밥 묵고 사우나 가고 다 했어!" 웃기면서도 한국 사회의 인맥 문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꼬집은 장면입니다.
- 익현이 형배를 배신하는 장면 — 말이 없고 표정만으로 이어지는 이 시퀀스에서 최민식의 연기가 정점을 찍습니다.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볼 때 객석이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최민식이 연기한 익현은 나약하고 비굴하지만, 그 비굴함을 거드름으로 포장하는 이중성이 압권입니다. 하정우의 형배는 반대로 과하지 않은 절제된 카리스마로 장면을 압도합니다. 조진웅, 마동석, 김성균, 곽도원까지 조연진 전원이 구멍 없이 채워주는 앙상블(ensemble)은, 앙상블이란 여러 배우가 고르게 존재감을 발휘하며 만들어내는 연기 조화를 말하는데,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봐도 질리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은 개봉 당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전국 약 47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결말 해석: 살아남은 자가 가장 나쁜 놈이라는 것
결말에 대해서는 "권선징악이 없어서 불쾌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불쾌함이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익현이 마지막에 벌을 받았다면 그건 위로가 됐겠지만, 현실에 대한 거짓말이 됐을 테니까요.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이후 주먹을 썼던 조폭들은 모두 감옥으로 갑니다. 하지만 익현은 악질 검사 조범석(곽도원)과 손을 잡고 오히려 형배를 함정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지막 장면, 익현은 손자 돌잔치에서 성공한 가문의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아들은 검사가 됐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대부님..." 하는 형배의 목소리. 이게 환청인지, 실제 출소한 형배가 찾아온 것인지 영화는 명확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 열린 결말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는데, 저는 익현이 죽을 때까지 떨쳐내지 못할 죄책감을 상징하는 장치라고 읽었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인생이지만, 그 위에는 배신과 이용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크리틱(critique), 즉 사회 비판적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먹은 감옥에 가지만, 인맥과 로비를 아는 자는 살아남아 기득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영화학계에서도 이 작품을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텍스트로 자주 인용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윤종빈 감독은 "누가 더 나쁜 놈인가"를 묻는 대신, 이런 나쁜 놈들이 득세하는 구조 자체를 조용히 고발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조폭 연대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스크린에 그대로 투사한 작품으로 오래 기억되는 겁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다시 보면서 가장 씁쓸했던 건, 익현이라는 인물이 낯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줄을 잡고, 명분을 찾고,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선택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우리 주변에도 있는 얼굴처럼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