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박스오피스 리뷰
🎬 지금 뜨는 신작
불러오는 중...

✍️ 블로그이름 리뷰
불러오는 중...
🎬 신작 & 개봉예정
불러오는 중...
✍️ 리뷰 전체
불러오는 중...
📺 OTT 신작
불러오는 중...
🎥 박스오피스 TOP 12
불러오는 중...
📍 내 주변 영화관 찾기

엽기적인 그녀 (명장면, 전지현, 재해석)


2001년 개봉 당시 네이버 네티즌 평점 9.30점을 기록하며 한국 로맨틱 코미디 역사를 다시 쓴 영화가 있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저는 그냥 웃기는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년쯤 지나 다시 꺼내 보고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기분이었습니다.

명장면 속에 숨어 있던 것들

2000년대 초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학창 시절에 이 영화를 처음 봤습니다. 당시 PC통신 연재 소설이 원작이라는 배경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였고, 교복을 입고 극장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의 설렘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상영관 안에서 전지현 배우의 파격적인 모습과 차태현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지요.

그런데 솔직히 그때는 명장면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승훈의 'I Believe'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며 견우가 다음 사람에게 그녀에 대한 수칙을 조근조근 알려주는 장면에서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저는 왜 우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견우와 그녀가 싸운 것도 아닌데 왜 헤어지는지, 왜 그냥 받아들이고 떠나가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됐거든요.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단순한 코미디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지현 캐릭터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애도(grief) 과정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도란 상실한 대상에 대한 감정을 단계적으로 처리해 가는 심리적 과정을 뜻하는데, 그녀의 모든 기행과 폭력적인 행동은 바로 그 과정의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그걸 어린 나이에 알 리가 없었지요.

전지현이 견우를 떠난 진짜 이유

다시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전지현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한진희 배우의 짧은 장면이었습니다. 견우를 앉혀 두고 독한 술을 딱 세 잔 마신 뒤 쓰러지면서 "내 딸 만나지 마라"고 하는 그 장면, 저는 처음엔 그냥 아버지의 딸바보 코믹 연기 정도로 넘겼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한진희가 연기한 아버지는 견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딸이 지금 이 청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딸이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견우를 이용하고 있으며, 이대로 관계가 이어지면 두 사람 모두 다친다는 걸 직감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을 한 겁니다.

캐릭터 심리 분석(character psychology analysis) 측면에서 보면, 전지현이 견우를 자꾸 가까이 한 건 본능적인 이끌림이고, 결국 그를 밀어낸 건 이성의 판단이었습니다. 캐릭터 심리 분석이란 인물의 행동 동기를 감정과 이성의 충돌 구조로 들여다보는 방식인데, 그녀는 죽은 전 남자친구를 잊기 위해 닮은 사람인 견우에게 기댔고, 동시에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알기에 떠났습니다. 견우의 마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이 이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견우의 고모 양금석의 아들이 바로 전지현의 옛 남자친구였다는 사실, 즉 견우의 사촌 형이 그녀의 전 남친이었던 것입니다. 같은 핏줄이기에 외모가 닮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고, 이 복선(foreshadowing)은 영화 초반부터 정교하게 심어져 있었습니다. 복선이란 후반부 사건을 앞서 암시하는 서사 장치인데, 이 영화는 그걸 코미디의 웃음 속에 아주 능숙하게 숨겨 놓았습니다.

장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이유

영화 평론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 중 하나가 장르 전복(genre subversion)입니다. 장르 전복이란 기존 장르의 관습적인 문법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전략을 뜻합니다. 곽재용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 전략을 아주 과감하게 사용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한국 멜로 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청순한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전지현이 연기한 '그녀'는 술을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고, 남자를 끌고 다닙니다. 이 파격이 당시 관객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친구들과 신발을 바꿔 신는 장난을 따라 했던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행이 됐지요.

미장센(mise-en-scène)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꼼꼼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채, 구도, 배우의 위치 등을 설계하는 영화적 개념인데, 타임캡슐이 묻힌 소나무 언덕의 드넓고 푸른 풍경과 과거·현재를 넘나드는 색채 대비는 인물들의 이별과 재회를 서정적으로 포착합니다.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과 신승훈 음악의 배치도 감정선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엽기적인 그녀는 2001년 개봉 당시 국내에서만 약 4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한류 콘텐츠의 초기 물결을 이끈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제가 직접 느낀 것처럼, 당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극장을 메웠던 광경은 단순한 흥행 이상의 문화적 현상이었습니다.

여친소와의 연결, 그리고 지금 다시 볼 이유

이 영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중국 자본이 투자된 후속 프로젝트 영화 여친소(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여친소에서 전지현의 남자친구 역을 맡은 장혁이 죽고, 마지막 장면에 전철역에서 차태현이 까메오로 등장합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전지현과 차태현이 전철에서 처음 만나는 설정이니, 이건 명확한 크로스오버 복선입니다.

제가 직접 두 영화를 연달아 다시 봤는데, 캐릭터의 자유분방한 기질,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설정, 전철역이라는 공간까지 겹치는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거기에 '견우(차태현)', '명우(장혁)' 라는 이름의 돌림자 구조까지 보면, 이 두 작품은 의도적으로 연결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엽기적인 그녀를 처음 보는 분이라면, 그리고 이미 봤지만 오래전 기억인 분이라면, 아래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다시 보시길 권합니다.

  1. 견우가 그녀의 행동을 불평하면서도 결국 다 따라주는 이유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그녀의 아픔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2. 전지현의 아버지가 "만나지 마라"고 한 장면이 코미디가 아니라 딸을 향한 진심 어린 경고였다는 것
  3. 타임캡슐 장면의 소나무 언덕이 두 사람의 감정이 처음으로 진짜가 되는 공간이라는 것
  4. 영화의 끝이 끝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시작이 열리고 있는 구조라는 것

이 네 가지를 알고 보면 러닝타임 137분이 전혀 다르게 흐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한국 대중영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인 만큼(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그 의미는 세월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그냥 웃기는 영화로 봤고, 지금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봅니다. 10년, 20년 뒤에 또 다시 꺼내 보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좋은 영화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하니, 오늘 밤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다시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시절 우리 모두가 갖고 있었던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