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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영화 리뷰 (스케일, 이병헌, 한계)


300억 원이라는 제작비, 이병헌과 하정우라는 조합, 거기에 백두산 폭발이라는 소재까지. 겨울 극장가에서 이만한 카드가 또 있을까 싶었으니까요. 가족들과 함께 들어선 상영관에서 저는 음료수 컵을 꼭 쥔 채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 때,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아깝다"가 아니라 "아쉽다"였습니다.

백두산 폭발, 기다릴 필요도 없었던 스케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재난을 터뜨립니다. 오프닝 시퀀스(Opening Sequence)란 영화의 도입부 장면을 뜻하는데, 보통 재난 블록버스터는 이 부분에서 긴 복선을 깔다가 한참 뒤에야 본 재난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달랐습니다. 강남역 한복판이 지진으로 무너지는 장면이 거의 초반 10분 안에 펼쳐졌고, 저는 그 선택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VFX(Visual Effects), 즉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시각효과 기술의 수준이 확실히 눈에 띄었습니다. 한강 해일 시퀀스와 도심 붕괴 장면은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무너진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재난 영화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줬습니다. 남의 나라 도시가 부서지는 것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제가 매일 다니는 거리가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이었으니까요. 직접 겪어보니 이 설정의 힘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다만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에 담기는 화면 구성 전체, 즉 배우의 위치, 조명, 배경을 아우르는 연출의 총체를 뜻하는데, 이 영화는 스펙터클한 CG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그 외의 미장센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얕게 처리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터지고 무너지는 장면은 박력 있었지만, 그 외 장면들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이병헌이라는 변수, 그리고 하정우의 반복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놀란 건 이병헌 배우였습니다. 북한 무력부 소속 스파이 리준평 역을 맡았는데, 그 캐릭터가 가진 미스터리함과 의외의 인간미를 이병헌은 대사 하나하나에 담아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좋은 배우는 뻔한 이야기도 살려낸다는 점이었습니다. 백두산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면 그 공의 절반은 이병헌 덕분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반면 하정우 배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작 PMC: 더 벙커를 본 관객이라면 분명히 느꼈을 텐데, 군복을 입고 재난과 싸우는 그 모습이 너무 익숙했습니다. 연기력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라, 캐스팅의 문제라고 봅니다. 단순반복은 언젠가 권태감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저 역시 그 순간이 왔음을 느꼈습니다.

마동석 배우의 등장도 짚고 싶습니다. 백두산 화산 연구를 지도하는 대학교수 역이었는데, 생각보다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굳이 이 역할에 이 배우를?"이라는 의문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캐스팅 파워를 흥행 전략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달까요. 제 경험상 이런 전략은 관객에게 금방 들킵니다.

이 영화에서 남과 북의 협력 구도와 두 배우의 버디 무비(Buddy Movie) 케미를 평가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 다른 두 인물이 한 팀을 이루며 사건을 헤쳐나가는 장르를 뜻합니다.

  1. 이병헌(리준평): 카리스마와 감정선을 동시에 가져가며 영화 전반을 지탱하는 핵심 존재
  2. 하정우(조인창): 소시민적 면모로 웃음을 이끌어내지만 전작과의 차별화가 아쉬움
  3. 두 인물의 티키타카: 긴장감을 풀어주는 완급 조절 기능은 충분히 수행
  4. 마동석(강봉래): 교수 역할로 배치됐지만 캐릭터 활용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함

한국 재난 영화가 반복하는 한계

그때 느낀 건, 백두산이 기술적으로는 분명히 한 걸음 전진했지만 이야기 구조는 제자리걸음이었다는 점입니다. 신파주의(新派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감동을 억지로 짜내기 위해 가족의 희생이나 이별 같은 감정적 요소를 과도하게 활용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안타깝게도 백두산 후반부는 이 공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아쉬웠던 건 국제 정치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한국 상업 영화에서 남과 북은 인간적이고, 미국과 중국은 악랄하게 그려지는 구도가 반복됩니다. 물론 영화적 허용(Poetic Licens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적 표현을 위해 현실과 다소 다른 설정을 허용하는 관행을 뜻하는데, 문제는 이 허용이 지나쳐서 관객이 이입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가버릴 때입니다. 백두산은 그 선을 좀 넘었다고 봅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국내 재난 블록버스터 장르는 전체 흥행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 관객 만족도 지수는 기대치 대비 낮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 이는 스케일은 커졌지만 각본의 완성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관람하며 느낀 불만이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이 수치가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링타임으로서의 가치

냉정하게 말하겠습니다. 백두산은 나쁜 영화가 아닙니다. 다만 소문과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 뿐입니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앉아서 시각적 쾌감을 즐기고 싶다면, 이 영화는 그 목적에 충분히 부응합니다. 신나게 부서지고 박진감 있게 싸우는 장면들이 주는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강렬한 감정 경험을 통해 심리적 긴장이 해소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제가 관람 후 가족과 나눈 대화가 기억납니다. 부모님은 "재밌었다"고 하셨고, 저는 "아쉬웠다"고 했습니다. 둘 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기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드문 경우입니다. 보통은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백두산은 이상하게도 두 감정이 동시에 공존했습니다.

참고로 영화 크레딧 중간에 쿠키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병헌과 하정우 배우의 케미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으니,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걸 권합니다. 기술력은 합격점이지만 각본은 아직 갈 길이 먼, 그것이 2019년 한국 재난 블록버스터의 현주소였습니다. 영화 백두산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은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백두산은 VFX 기술로는 분명히 한국 영화의 한계를 넓혔지만 각본과 서사 면에서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야기가 관객을 이끌지 못하면 오래 남는 영화가 되기 어렵습니다. 연말 극장을 찾을 계획이 있다면,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가시기를 권합니다. 화려한 볼거리와 이병헌의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영화관 나들이가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