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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 (재난장르, 사회적메타포, 클라이밍액션)


무더위가 절정이던 2019년 여름,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저는 별 기대 없이 극장 문을 밀었습니다. 그날 만난 영화가 <엑시트>였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무겁고 암울하기만 하던 한국 재난 영화의 공식을 완전히 비틀어버린, 유쾌하면서도 묘하게 가슴 한켠을 찌르는 작품이었으니까요.

백수 청년과 유독가스, 그 여름날의 극장

영화는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한 청년 용남(조정석)이 어머니의 칠순 잔치 자리에서 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를 재회하고, 그 자리에서 의문의 유독가스 사태가 터지면서 두 사람이 도심 한복판을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2019년 7월 31일 개봉했고, 이상근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지금 돌아봐도 믿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제가 극장을 찾았던 그날, 저도 이래저래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쌓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딱히 뭔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머릿속을 잠시 비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10분도 안 돼 상영관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주인공들이 쓰레기봉투를 온몸에 두르고 유독가스를 피해 달리는 장면은, 긴장감과 웃음이 동시에 터지는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감각은 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관객 반응이었습니다. 옆자리 아저씨가 손으로 팔걸이를 꽉 쥐고, 앞줄 커플은 서로 손을 잡고, 뒷자리에서는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극장 전체가 숨을 같이 참는 느낌. 그때 저도 어느새 스크린 속 옥상을 향해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청년 실업을 재난으로 치환한 사회적 메타포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게 단순한 오락 영화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엑시트>는 표면적으로는 재난 장르(disaster genre)이지만, 그 안에 꽤 날카로운 사회적 메타포(social metaphor)를 품고 있습니다. 사회적 메타포란 현실의 사회 문제를 다른 상황이나 사건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서사 기법을 뜻합니다.

용남이 백수로 구박받던 산악부 클라이밍(climbing) 실력이 재난 상황에서 유일한 생존 무기가 되는 설정이 바로 그 핵심입니다. 클라이밍이란 암벽이나 건물 외벽 등을 손발을 이용해 오르는 기술로, 영화에서는 도심 빌딩 숲을 헤치는 생존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능력이 위기의 순간 가장 빛나는 무기가 된다는 설정 자체가, 지금 이 시대 청년들에게 보내는 격려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청년 실업 문제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출처: 통계청 KOSIS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청년(15~29세) 실업률은 8.9%로, 전체 실업률 3.8%의 두 배를 훌쩍 넘겼습니다. 용남의 모습이 단순한 코미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의 거울처럼 보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주 역시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직장상사의 갑질로 힘들게 버티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현실, 그 씁쓸함도 영화는 놓치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묘한 서늘함이었습니다. 화면 속 유독가스가 퍼지는 풍경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거든요.

<엑시트>가 기존 한국 재난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신파(melodrama), 즉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해 눈물을 쥐어짜는 서사 방식을 철저히 걷어냈습니다. 대신 코미디와 액션의 완급 조절로 관객이 숨 쉴 틈을 주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했습니다. 저는 평소 한국 영화를 잘 안 보는 편인데, 그게 딱 이 신파 때문이었습니다. <엑시트>는 그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깨버린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잘 살아난 연출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거창한 CG 스펙터클 대신 인물의 신체 액션 중심으로 서스펜스를 구축해 현실감을 높였습니다.
  2. 도심 빌딩 옥상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긴장감 넘치는 무대로 전환하는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였습니다.
  3. 조정석과 임윤아의 코믹 연기 호흡이 극의 무게감을 균형 있게 조절했습니다.
  4.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적 현실을 재난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여 서사의 밀도를 높였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인물, 조명, 배경, 소품 등 모든 시각적 요소를 총칭하는 영화 용어입니다. <엑시트>는 이 미장센 측면에서도 꽤 영리했는데, 좁은 옥상과 빽빽한 빌딩 숲이 만들어내는 압박감이 유독가스의 공포를 CG 없이도 충분히 전달했습니다.

클라이밍 액션이 남긴 것, 그리고 이상근 감독의 다음 행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한 가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클라이밍을 배워야겠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뭐든 배워두면 언젠가는 써먹는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습니다. 용남이 건물 외벽을 타고 오르는 장면은, 특수 장비 없이 오직 몸 하나로 상황을 돌파하는 모습이라 더 짜릿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살짝 다른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용남과 의주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며 뛰는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눈물이 조금 고였습니다. 재난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취업난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청년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용남이 백수로 나와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근 감독은 이 영화로 데뷔했습니다. 데뷔작에서 장르 혼합, 사회적 메시지, 배우 연기 조율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해낸 감독이라면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임윤아의 푼수 연기도 예상보다 훨씬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영화 <공조>에서도 임윤아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는데, 그때와 비교해도 <엑시트>에서의 케미가 훨씬 살아있었다는 게 제 경험상 확실한 인상입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집계에 따르면 <엑시트>는 개봉 후 누적 관객 수 942만 명을 기록하며 2019년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습니다(출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KOBIS). 단순한 여름 흥행작이 아니라, 시대의 정서를 제대로 건드린 영화였기에 가능한 결과라고 봅니다.

극장을 나서던 그날 밤, 저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한동안 걷고 싶었습니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이상하게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앞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지금 내가 가진 작은 능력들을 조금 더 믿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난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해서, 끝나고는 뭔가 하나를 얻어 나오는 영화입니다.